경허스님

어느 날 전염병이 돌고 있는 마을에서 사람들의 죽음을 보고 문자 공부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오로지 영운(靈雲) 선사의 「驢事未去馬事到來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는 화두를 들고 정진하였습니다. 그러나 화두는 해석도 되지 않고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딪혀 괴로워할 때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아랫마을 이처사(李處士)의 말을 듣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니 1879년 34세 때였습니다. 1880년 봄에 연암산 천장사에 들어가 보림(保任)에 들어가니 이듬해 6월 활연대오(豁然大悟)하여 오도가(悟道歌)를 불렀습니다.

- 忽聞人語無鼻孔 홀문인어무비공
- 홀연 콧구멍 없다는 말에
- 頓覺三千是吾家 돈각삼천시오가
- 돌연 우주가 내 집인 줄 깨달았네
- 六月燕岩山下路 유월연암산하로
- 유월에 연암산 내려오는데
- 野人無事泰平歌 야인무사태평가
- 거지는 일 없어 태평가를 읊느니

이 오도송은 수덕사 송원설정(松原雪靖) 대종사(大宗師)의 글씨로 부석사 향적당(공양간) 주련에 새겨져 있으니 한 번 찾아보기 바랍니다. 천장사에서 주석할 때 경허의 '삼월(三月)'로 불리는 수월스님과 혜월스님과 만공스님이 출가하여 함께 수행하였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천장사에서 지내면서 개심사, 부석사, 간월암 등지를 다녀오기도 하였는데 이때 경허스님과 제자들 간의 많은 일화가 전해집니다. 부석사 심검당에 있는 「목룡장(牧龍莊)」 편액을 경허스님이 쓴 것입니다. 스님은 1894년 범어사 조실, 1899년 해인사 인경불사와 수선사 불사를 주관했습니다. 그 뒤 구례 천은사, 안변 석왕사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함경도에서 돌연 환속하여 머리를 기르고 박난주(朴蘭州)로 이름을 바꾸고 살았습니다. 1912년 4월 25일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했는데, 세납 64세, 법랍 56세 때였습니다. 저서로는 《경허집》이 있습니다. 경허 스님의 수제자로 흔히 '삼월(三月)'로 불리는 혜월(慧月), 수월(水月), 만공(滿空)선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