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7년 만의 일시 귀향 ---서산 부석사 불상의 얄궂은 운명 - 주간경향2025.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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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71회 작성일 25-02-10 14:19본문
대법 판결로 소유권 논쟁은 끝나…‘약탈 문화재 반환’ 외교 협상 시급
지난 1월 24일, 충남 서산 부석사에서 불상 한 점이 공개됐다. 높이 50.55㎝, 무게 38.6㎏의 이 불상은 금속을 녹여 관음보살을 형상화했다. 불교에서 ‘자비’를 상징하는 관음보살은 ‘세상의 소리를 듣고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자연히 관음보살상에는 해당 지역 사람들의 시대적 바람이 담기게 된다. 이는 불상이 종교적·예술적 가치를 넘어 그 자체로 역사라고 불리는 이유다.
이날 공개된 불상도 제작 시기, 처음 모신 장소 등이 특정된 귀중한 사료다. 고려 말인 1330년 2월 서주 지역에서 제작됐고, 총 32명의 시주자가 있었으며, 불상을 모신 절의 이름이 부석사라는 것까지 확인됐다. 현재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고려시대 행정 명칭이 서주다. 이 지역에 있는 부석사는 677년에 창건된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 도비산에 있는 ‘서산 부석사’가 유일하다. 즉 현재의 서산 부석사가 불상이 원래 봉안된 절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 불상이 서산 부석사에서 공개된 것은 647년 만에 처음이다. 이마저도 오는 5월 5일 ‘부처님 오신 날’까지 딱 100일간만 이곳에서 볼 수 있다. 이후 불상은 부석사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현 쓰시마섬(대마도)에 있는 관음사로 옮겨진다.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이 고향에서 보내는 마지막 100일이다.
서산 부석사는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천년 고찰이다. 절이 산자락에 안겨 있는 듯해 고즈넉한 멋을 만끽할 수 있다. 다만 세계문화유산인 영주 ‘부석사’처럼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는 유명 관광지는 아니다. 오히려 템플스테이같이 조용히 ‘쉼’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지난 2월 1일 찾은 서산 부석사는 이러한 세간의 평가를 모두 무색하게 만들었다.
절 초입부터 도비산 자락을 걸어서 오르는 사람들로 붐볐다. 설 연휴 동안 내린 눈이 완전히 녹지 않아 산 아래 차를 두고 걷는 사람들이었다. 관광버스가 들어오며 그렇지 않아도 좁은 주차장은 빈 곳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길 군데군데 걸린 현수막은 이들이 추운 겨울 산길을 오르는 이유를 설명했다. 현수막에는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 귀향을 환영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반에 공개되는 일정이다.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에는 정식 이름보다 유명한 출처 불명의 별칭들이 있다. 왜구 약탈 불상, 대마도 고려 불상, 훔쳐 온 불상 등이다. 나름의 근거가 있다. 1330년 2월에 제작돼 봉안된 불상은 14세기 말,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그로부터 600여 년이 지난 1985년,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가 해당 불상이 일본 대마도 관음사에 있다고 알린다. ‘서산 부석사 불상이 왜 일본에 있느냐’를 두고는 여러 설이 제기됐다. 이중 가장 유력한 것이 왜구 약탈설이었다.
고려말 왜구의 약탈이 극심했는데 현재의 서산 지역도 대표적인 피해지였다. 지금은 간척 등으로 주변 지형이 변했지만 서산 부석사는 약 700년 전에는 배를 타고 지나가며 볼 수 있을 정도로 해안에서 가까운 절이었다. 실제로 ‘부석’이라는 이름 자체가 물에 떠 있는 바위를 뜻할 뿐만 아니라 창건 설화에도 ‘해적’이 나온다. 각종 사료를 기반으로 절이 왜구에 침략당했을 때를 특정해보면 1375년 9월, 1378년 9월, 1381년 9월로 좁힐 수 있다. 이중 침략 경로 등을 종합해볼 때 서산 부석사가 피해를 보았을 것으로 가장 유력한 해는 1378년 9월이다. 왜구 약탈 불상, 대마도 고려 불상이라는 별칭은 이렇게 붙었다.
또 하나의 별칭이 추가된 것은 2012년 10월 6일경 벌어진 사건 때문이다. 이날 대마도 관음사에서 불상 절도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사라진 불상 두 개가 한국으로 밀반입됐는데 이중 하나가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이었다. 절도범들이 붙잡히는 과정에서 불상이 압수됐고, 정부가 일본에 불상을 반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서산 부석사가 점유이전금지가처분 소송(2013년 2월 19일)과 유체동산인도소송(2016년 4월 20일) 등을 제기했다. 2023년 10월 26일, 대법원 판결까지 장장 10년이 걸린 불상을 둘러싼 법정 다툼의 시작이었다.
불상 소유권을 두고 대법원 1부(주심 대법관 오경미)는 “불상이 제작·봉안된 고려시대 사찰 ‘서주 부석사’와 원고(서산 부석사)는 동일한 권리주체로 볼 수 있지만, 일본 관음사가 불상을 시효취득한 것으로 볼 수 있어 원고는 이 사건 불상의 소유권을 상실하였다”고 판결했다. 원래 불상이 서산 부석사에 있던 것이 맞지만, 일본 관음사가 법인격을 취득한 1953년 1월 26일부터 20년간 소유의 의사로 점유(자주점유)해 취득시효가 완성됐다는 것이다. 이로써 ‘647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머물 수 있는 시간은 100일’이라는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의 기구한 운명이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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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4일, 충남 서산 부석사에서 불상 한 점이 공개됐다. 높이 50.55㎝, 무게 38.6㎏의 이 불상은 금속을 녹여 관음보살을 형상화했다. 불교에서 ‘자비’를 상징하는 관음보살은 ‘세상의 소리를 듣고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자연히 관음보살상에는 해당 지역 사람들의 시대적 바람이 담기게 된다. 이는 불상이 종교적·예술적 가치를 넘어 그 자체로 역사라고 불리는 이유다.
이날 공개된 불상도 제작 시기, 처음 모신 장소 등이 특정된 귀중한 사료다. 고려 말인 1330년 2월 서주 지역에서 제작됐고, 총 32명의 시주자가 있었으며, 불상을 모신 절의 이름이 부석사라는 것까지 확인됐다. 현재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고려시대 행정 명칭이 서주다. 이 지역에 있는 부석사는 677년에 창건된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 도비산에 있는 ‘서산 부석사’가 유일하다. 즉 현재의 서산 부석사가 불상이 원래 봉안된 절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 불상이 서산 부석사에서 공개된 것은 647년 만에 처음이다. 이마저도 오는 5월 5일 ‘부처님 오신 날’까지 딱 100일간만 이곳에서 볼 수 있다. 이후 불상은 부석사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현 쓰시마섬(대마도)에 있는 관음사로 옮겨진다.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이 고향에서 보내는 마지막 100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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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의 기구한 운명
서산 부석사는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천년 고찰이다. 절이 산자락에 안겨 있는 듯해 고즈넉한 멋을 만끽할 수 있다. 다만 세계문화유산인 영주 ‘부석사’처럼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는 유명 관광지는 아니다. 오히려 템플스테이같이 조용히 ‘쉼’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지난 2월 1일 찾은 서산 부석사는 이러한 세간의 평가를 모두 무색하게 만들었다.
절 초입부터 도비산 자락을 걸어서 오르는 사람들로 붐볐다. 설 연휴 동안 내린 눈이 완전히 녹지 않아 산 아래 차를 두고 걷는 사람들이었다. 관광버스가 들어오며 그렇지 않아도 좁은 주차장은 빈 곳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길 군데군데 걸린 현수막은 이들이 추운 겨울 산길을 오르는 이유를 설명했다. 현수막에는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 귀향을 환영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반에 공개되는 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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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에는 정식 이름보다 유명한 출처 불명의 별칭들이 있다. 왜구 약탈 불상, 대마도 고려 불상, 훔쳐 온 불상 등이다. 나름의 근거가 있다. 1330년 2월에 제작돼 봉안된 불상은 14세기 말,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그로부터 600여 년이 지난 1985년,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가 해당 불상이 일본 대마도 관음사에 있다고 알린다. ‘서산 부석사 불상이 왜 일본에 있느냐’를 두고는 여러 설이 제기됐다. 이중 가장 유력한 것이 왜구 약탈설이었다.
고려말 왜구의 약탈이 극심했는데 현재의 서산 지역도 대표적인 피해지였다. 지금은 간척 등으로 주변 지형이 변했지만 서산 부석사는 약 700년 전에는 배를 타고 지나가며 볼 수 있을 정도로 해안에서 가까운 절이었다. 실제로 ‘부석’이라는 이름 자체가 물에 떠 있는 바위를 뜻할 뿐만 아니라 창건 설화에도 ‘해적’이 나온다. 각종 사료를 기반으로 절이 왜구에 침략당했을 때를 특정해보면 1375년 9월, 1378년 9월, 1381년 9월로 좁힐 수 있다. 이중 침략 경로 등을 종합해볼 때 서산 부석사가 피해를 보았을 것으로 가장 유력한 해는 1378년 9월이다. 왜구 약탈 불상, 대마도 고려 불상이라는 별칭은 이렇게 붙었다.
또 하나의 별칭이 추가된 것은 2012년 10월 6일경 벌어진 사건 때문이다. 이날 대마도 관음사에서 불상 절도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사라진 불상 두 개가 한국으로 밀반입됐는데 이중 하나가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이었다. 절도범들이 붙잡히는 과정에서 불상이 압수됐고, 정부가 일본에 불상을 반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서산 부석사가 점유이전금지가처분 소송(2013년 2월 19일)과 유체동산인도소송(2016년 4월 20일) 등을 제기했다. 2023년 10월 26일, 대법원 판결까지 장장 10년이 걸린 불상을 둘러싼 법정 다툼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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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 소유권을 두고 대법원 1부(주심 대법관 오경미)는 “불상이 제작·봉안된 고려시대 사찰 ‘서주 부석사’와 원고(서산 부석사)는 동일한 권리주체로 볼 수 있지만, 일본 관음사가 불상을 시효취득한 것으로 볼 수 있어 원고는 이 사건 불상의 소유권을 상실하였다”고 판결했다. 원래 불상이 서산 부석사에 있던 것이 맞지만, 일본 관음사가 법인격을 취득한 1953년 1월 26일부터 20년간 소유의 의사로 점유(자주점유)해 취득시효가 완성됐다는 것이다. 이로써 ‘647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머물 수 있는 시간은 100일’이라는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의 기구한 운명이 확정됐다.
첨부파일
- 금동관세음보살좌상.jpg DATE : 2025-02-10 14:19:17

